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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oam(admin) 시간 2017-12-06 22:10:46 조회수 2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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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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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생, 용산고등학교, 미국 콜럼비아에서 미술사학과 학사졸업. 시카고 대학원과정에서 미술사·이론 & 예술비평과 예술경영·정책학을 공부, 졸업한 아직 많이 부족한 인문학도人文學徒.

 

 

1. 비나이다 비나이다​_다솜의 시작 웅녀설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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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전 지운영(1852~1935), <단군영정(부여 천진전 단군화상)>, 견본담채, 33.6 x 53.3 cm, 1910?, 

 개인소장(국립부여박물관 기탁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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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좌) 지성채(1899~1979), <단군초상>, 1946, 대종교; (우) 홍석창, <단군초상>, 1977, 현정회 

 

 

우리의 시조, 단군왕검

화면의 중앙에 인자하고 후덕한 모습의 노인이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조용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머리는 길게 땋아 두르고 망사 형태로 보이는 덮개를 쓰고 있다. 그윽하고 인자한 눈빛을 머금고 있는 봉안鳳眼 형태의 눈, 짙은 눈썹, 굵고 곧게 뻗어 내린 코, 두툼한 입술, 그리고 크고 길게 내려온 양쪽 귀와 잘 다듬어진 길고 풍성한 수염 등의 표현으로 인자하지만 근엄함이 묻어나는 앞선 세대 우리의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이다. 어깨와 허리를 풀과 나뭇잎으로 치장한 발목까지 흘러내린 흰색 도포 형태의 겉옷을 입고 옷 소매에 두 손을 넣고 한층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 만든 의자에 앉아 보는 이를 그윽하고 근엄하게 바라보고 있는 노인은 누구일까? 눈, 입과 귀 주위의 음영표현, 도포 형태의 겉옷 윤곽선과 주름은 짙게 그리고 그 안은 엷게 채색했으며 옷주름의 주변을 또한 음영 처리하여 입체감을 준다. 이는 다름아닌 우리의 시조로 알려진 단군영정의 한 모습(도 1)이다. 현재 다양한 모습과 형태의 단군영정이 존재하고 있다 알려져 있는데, 위 그림은 신라시대 화가 솔거가 그린 단군의 모습을 1910년경 대종교를 창건한 나철(羅喆, 1863~1916)의 요청으로 당시 대표적 화가였던 백련蓮 지운영(, 1852~1935)이 모사한 그림으로 전해진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현재 단군 그림은 여러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유포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단군 그림은 현재 대종교 소장본인 지성채(지운영의 아들) 화백의 그림(도 2 (좌))과  당시 '정부표준영정제도'에 의해 1977년 현정회의 의뢰로 그려지고 그 이듬해(1978) 공인된 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홍석창의 ‘정부 표준 단군 영정(도 2 (우))’이다. 이 두 그림이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공인된 단군의 모습이다. 어떻게 정부로 부터 인증을 받은 단군의 영정이 두개일까? 그리고 솔거가 그린 그림을 지운영이 모사했다 전해지는 단군영정(도 1)과 이 그림들과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단군신화'로 더 잘 알려져있는 우리 다솜의 시작인 '웅녀설화'를 통하여 위 그림들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배경과 그 의미를 살펴보자.  

 

일연의 삼국유사와 고조선[왕검조선]

현재 전하는 '단군'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13세기 말 승려 일연에 의하여 씌어진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전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古朝鮮 [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艸+兎], 樂浪, 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 [왕검조선]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어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요堯:고려 정종의 이름 '요堯'를 피하여 기록하기 위함]와 같은 시기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말함; 현재 전하는 『삼국유사』원본인 정덕본正德本에는 '환국桓國'이라 전하는데 일제시대 '환인'으로 날조되었다고 한다.)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바라여 구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 이의 해석에 관하여 설이 분분하다.)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 인간(人間)세계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桓雄)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곧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壽命)·질병(疾病)·형벌(刑罰)·선악(善惡) 등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살피고 교화(敎化)했다.  당시 곰 한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神雄), 즉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해달라 기원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했다.


이에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 먹으며 삼칠일(21일) 동안 금기했는데, (금기를 100일 동안 잘 지킨)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함께 혼인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고로 매일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주원했다. 이에 환웅이 임시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여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했다. 단군 왕검은 당고(唐高)[당요]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庚寅年; 요堯가 즉위한 원년元年은 무진戊辰년이니, 50년은 경인庚寅년이 아니라 정사丁巳년이므로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기니 궁홀산(弓忽山; 일명 방홀산方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이곳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무왕]이 즉위하던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이에 단군(檀君)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몰래 돌아와 아사달(阿斯達)에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였다."

 

당나라 <배구전(裴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었는데,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를 봉하면서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한(漢)나라가 나누어 세 군(郡)으로 설치하였으니, 이것이 곧 현도(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말과 같다.(한서漢書에는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  네 군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세군을 말하고 이름 또한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기록, 이 부분 뿐 아니라 모든 고대사 부분이,은 많은 풀어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다. '단군'의 기록(단군신화)을 역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신화로 볼 것인가?를 시작으로, 이 기록에 나타난 모든 지명의 위치 등 많은 부분이 명확이 밝혀지지 않았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성과 등으로 이 단군신화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부각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기록의 전부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아직 힘들다.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환(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등의 사서에 비교적 상세히 전하지만 이 사서들의 내용을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다.(이 사서들에 관한 내용은 참고자료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주목할 만한 부분도 있기에 무조건 살펴볼 가치가 없다 할 수는  없다 생각한다. 이에 관하여 조선시대 전기(1485, 성종 16)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최부崔溥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중 「외기外紀」편의 편찬자들의 사론 부분을 참조 할 만하다.     

 

檀君朝鮮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있어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움에 그가 바로 단군이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바로 당요의 무진년 때 일이다.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백악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상나라 무정 임금 8년인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臣等按]《古紀》云: 「檀君與堯並立於戊辰, 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享壽千四十八年.」 此說可疑. 今按, 堯之立在上元甲子甲辰之歲, 而檀君之立在後二十五年戊辰, 則曰與堯並立者非也. 自唐虞至于夏.商, 世漸澆漓, 人君享國久長者, 不過五六十年, 安有檀君獨壽千四十八年, 以享一國乎. 知其說之誣也. 前輩以謂, 其曰千四十八年者, 乃檀氏傳世歷年之數, 非檀君之壽也, 此說有理. 近世權近, 入覲天庭, 太祖.高皇帝, 命近賦詩, 以檀君爲題, 近詩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帝覽而可之, 時論亦以近之言爲是, 姑存之以備後考.

[신 등이 생각키로]《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은 요임금과 더불어 무진년에 재위에 올랐으며, 우 그리고 하의 시대를 지나 상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48년이다」라 하였는데, 이 이야기는 의심이 된다. 지금 생각건대, 요임금이 재위에 오른 것은 상원갑자 갑진년 때이며 단군이 재위에 오른 것은 그 25년 뒤인 무진년이니 '요임금과 더불어 재위에 올랐다'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당우로부터 하나라와 상나라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점차 각박해져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며 재위에 오래도록 있다하더라도 오륙십년을 넘기지 못하였는데, 어찌 유독 단군만이 1천48년의 수를 누리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있었겠는가. 앞선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1천48년이라 말하는 것은 단씨가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일 뿐이지 단군의 향년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그 이야기가 이치에 맞다. 근래 권근이 황궁에 들어가 천자를 알현하였는데, 태조 고황제가 권근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함에 '단군'을 시의 제목으로 하게 하였더니 권근이 시에서 말하기를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천년은 족히 넘었도다」라 하니 천자가 그것을 살펴보고는 그럴 것이라 하였으며, 그 당시의 논평 또한 권근의 말을 옳은 것으로 여겼기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서 후에 고찰하여 볼 수 있도록 한다.

 

이와 같이 고대의 기록들을 살펴 볼 때에는, 많은 선학 분들이 지적한대로,  비판적 사고와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고 있고 알고 있는 사실들은 이 세상의 모든 진리, 사실과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 아니 그보다 작은 부분일 수 있다. 때문에 모든 기록들을 비판적, 고증학적으로 살피되 모든 부분의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단군왕검이 창건했다 전해지는 '고조선'에 관한 주목할만한 많은 연구성과들이 나오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위에 언급했던  『환(한)단고기桓檀古記』등의 사서들에 관한 역사학계 연구자들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연구가 이루어 지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이 글의 뒷 부분 '웅녀설화' 부분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넘어가기 전에 몇 가지 짚어보자. 먼저 부여 천진전과 대종교 단군영정 중 단군의 어깨와 허리부분에 치장된 풀과 나뭇잎에 관한 부분이다. 이 잎들에 관하여 풀과 나뭇잎이다, 신단수 잎이다 등 많은 설이 있으나, 필자는 어깨에 걸친 것은 마늘잎이고 허리부분은 쑥이라 확신한다. 전하는 말대로 '부여 천진전 단군화상(도 1)'이 솔거의 원본을 지운영이 모사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웅녀가 쑥과 마늘을 먹고 단군을 잉태하였다는 내용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원본그림이 그려질 당시에도 잘 알려져 있었을 거라 생각되고, 쑥과 마늘은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단군'을 있게한 '생명잉태'의 매개체이자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또 영정에서 보이는 단군의 머리양식과 머리덮개, 의복, 그리고 신발 등에 관한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다음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해석에 관한 부분이다. 아래의 부분을 살펴보자.(다른 부분은 위 해제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이 부분의 해석을 대부분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 먹으며 삼칠일(21일) 동안 금기했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금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라 하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다. 앞뒤의 문맥상 '삼칠일' 금기를 해서 곰이 사람의 몸을 얻은 것이 아니라, "곰과 호랑이 모두 '삼칠일' 동안 금기를 했으나 이 후 호랑이는 100일 동안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함이 좀 더 매끄럽고 정확한 해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 』에 실려있는 단군의 이야기는 신화일까?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대부분의 사가들과 마찬가지로, 필자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신화적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구분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가리지 않고 그 나라, 민족 역사의 첫 장은 대부분 신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들에 역사적 사실들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와 마찬가지로『삼국유사 』에 전하는 '단군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신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추려내는 일이 바로 역사가들의 임무라 생각한다.  또한 표제가 『삼국유사三國遺事』인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기史記, 사' 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유사(遺事: 일, 사건 등을 남김.)' 단어를 선택하여 사용함으로써 일반 사서들과 달리 저자의 자유로운 편찬의도를 담을 수 있었다 생각한다. 이와 같은 저자 일연의 뜻은 그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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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일연, 『삼국유사三國遺事』, 규장각 소장 (출처: 한국 브리테니커)

 

紀異卷第一

 

叙曰.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然而帝王之將興也. 膺符命, 受圖籙, 必有以異於人者. 然後能乘大變, 握大器, 成大業也. 故,河出圖, 洛出書, 而聖人作. 以至虹繞神母而誕羲, 龍感女登而生炎. 皇娥遊窮桑之野. 有神童自稱白帝子, 交通而生小昊, 簡狄呑卵而生契, 姜嫄履跡而生弃, 胎孕十四月而生堯,龍交大澤而生沛公. 自此而降. 豈可殫記. 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

 

기이권제일

 

첫 머리에 말한다.(서술하여 말한다.)

대체로 옛날 성인(聖人)이 그 예악으로써 나라를 세웠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풀었는데, 곧 '괴력난신(괴이, 완력, 패란, 귀신)'이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나 제왕(帝王)은 [괴력난신을] 거느리고 나라를 세웠다. 부명(符命: 명령의 징표,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운 징표)을 받고 도록(圖籙: 미래 길흉화복을 예언한 기록)을 받아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고, 그런 후에 응당 큰 변을 극복하고(이기고) 큰 그릇(넓은 기량)을 쥐고(얻어) 대업을 이루었다. 

그런 까닭에 하수(河水: 황하)에서 그림(팔괘)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오면서 성인(聖人)이 일어났던 것이다.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두르는 것으로써 복희(伏羲)를 낳았고, 용이 여등(女登: 신농씨의 어머니)과 감응하여 염제(炎帝)를 낳았으며, 황아(皇娥: 소호씨의 어머니)가 궁상(窮桑)이라는 들판에서 노니는데 자신을백제(白帝)의 아들이라 칭하는 신동(神童)이 있서 교통하여 소호(少昊)를 낳았고,  간적(簡狄)은 알(卵)을 삼키고 설(契)을 낳았으며, 강원(姜嫄)은 거인(巨人)의 발자취를 밟고 기(充)를 낳았고,  요(堯)의 어머니는 14개월을 잉태하여 요(堯)를 낳았고, [패공(沛公)의 어머니는] 용(龍)과 큰 연못에서 교감하여 패공(한나라 제1대 황제 유방)을 낳았다.  이로부터 뒤로도 [이런 일들이] 흘러 넘치니 어찌 모두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즉,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서 나온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이에 기이편을 모든 편의 첫머리에 싣는다. 이에 실로 뜻이 있다. 

 

서설이 너무 길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점들이 단군이야기가 담겨있는 '다솜의 시작 웅녀설화'를 '우리설화 속 다솜이야기' 부분에 싣는 이유이다. 


by Paul Lee


https://www.youtube.com/watch?v=oofSnsGkops 

 

https://www.youtube.com/watch?v=etadXxkxJ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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