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Dicourse & Critique

 

작성자 moam(admin) 시간 2023-04-01 20:44:55 조회수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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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수, “「서봉모운이강호십곡병」- ‘서봉모운십곡병’의 내용⋅의미와 이를 통해 본 당대 학자들의 교유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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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2008년, 학자는 책으로말하면 되는 것 아니냐 여쭈었었는데. 아쉬운 부분.

 

 

玄山 李玄圭의 삶과 문장관 (CLICK)

 

이 논문은 20세기 전반의 근대 한문문장가인 현산 이현규의 삶과 문장관을 살핀 결과물이다. 현산 이현규는 학계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에 먼저 선행연구에 나타난 그의 생애와 김문옥이 쓴 〈玄山 李公家傳>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교유를 정리하고, 이어서 현산의 문집인 《현산집》에 나타난 현산의 문장관, 문장전범을 살펴보았다. 현산은 한문이 공식적인 종말을 맞은 1894년(갑오년)에, 入山自靖하여 고단한 생활을 해나갔다. 그 와중에도 부친을 비롯한 집안사람들의 지원 속에 한문을 놓지 않았다. 곤궁함에서 훌륭한 문장이 탄생했음을 알고나서는 고인의 글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古文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고, 이후 독학으로 고문을 터득했다. 현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또한 현산은 평생 충청도 부여와 기성 일대에서 생활하여 다소 고립된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문장 실력은 정인보, 조긍섭, 변영만 등 당대 저명한 한문학 작가들에게 알려졌다. 그 결과 다른 지역의 근대 한문문장가들과 교유를 맺게 되었다. 한문이 계속해서 소외되는 상황 속에 한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골육처럼 생각해 각별하게 생각하고 교류를 계속하였는데, 그 인맥네트워크에 현산이 속해있다. 현산은 `문장은 道가 피어난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므로, 도가 포함한 문장을 단순히 `기예`라 여기는 견해를 배척했다. 글은 기본적으로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문장의 `간결`을 매우 강조했다. 또한 현산은문법 통달을 통해 문사를 통달하고, 이후 전체 문장의 뜻을 터득해야 함을 강조했다. 문법의 강조는 현산이 문장을 정치하게 쓸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현산이 이상적인 글로 생각한 것은 先秦 兩漢의 글이고, 六經 수준의 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육경을 읽기 전에 먼저 당나라의 한유, 유종원와 송의 구양수, 왕안석의 글을 숙독하여 글의 취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후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들의 글 속에 헤엄치며 정신과 합일하고 글자 하나하나, 구를 뜯어보며 글쓰기의 실체를 만났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뜻을 어떻게 배치하고[용의], 글자를 어떻게 써야하는지[조사] 알게 되어 의심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산은 문장관과 문장전범을 확립하여 자신만의 문장을 완성시켰다. 현산은 당시 근현대 한문 식자층의 동반자로서 위로가 되는 존재였으며,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었던 충청도를 대표했던 한문문장가였다. 현산의 문장관을 통해 한문학의 전통이 근현대에도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대 한문문장가의 사유를 알 수 있다.

 

왜, 부친께서 글씨를 '물고기'에 비유했는지도 이해가 간다. 부친의 생 전 말씀에 의하면, 현산 선생님께서​ 필법 이론에 해박하셨다고 한다.

 

 "Deo, l'universo corregge tutti i torti."

       Religioni et Bonis Artibus      

 

 

「서봉모운이강호십곡병書奉 茅雲 李康灝十曲屛

- ‘서봉모운이강호십곡병’의 내용⋅의미와 이를 통해 본 당대 학자들의 교유관계




  1. 서론



「서봉모운이강호십곡병書奉 茅雲 李康灝十曲屛」은 일제강점기 말 충청남도 논산에 있던 효령대군 18대손 전주 이강호李康灝(1899~1980)를 당시 전라북도 익산에 머물던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1892~1950?)가 찾아와 수 일을 함께 머물며 고문 등 학술적 논의와 담소를 나누고 서화들을 감상하며 지내시다 익산으로 돌아가시기 전 이강호에게 ‘모운茅雲’이라는 호를 주며 위 내용을 큰 폭 열장의 한지에 적어 기록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전라북도 익산에서 떠나오면서부터 충청남도 논산으로 와 이강호를 서로 교유하며 수 일을 지내다 다시 익산으로 돌아갈때까지의 내용을 두터운 한지에 각 세로 139cm, 가로 35cm의 대폭에 행서行書 기운이 강한 글씨로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마지막 관서 부분에 붓으로 찍은 먹점이 있다. 당시 정인보, 이강호 뿐 아니라 논산 갑부 윤희중, 정인보를 모시고 있던 익산 윤석오 등 여러분이 함께 계셨다 알고 있다. 이때 현산 이현규도 함께 있었는지는 확실지 않으나 만나지 않았을까 추측이 가능하다. 이 만남 후 조부 이강호가 부친 이영재를 ‘현산학당’에 보내셨다. 


1978년 12월 이강호 팔순을 기념하여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소장품 전시를 할때 공개한 것을 제외하면 일반에게 공개된 적이 없다. 본래 10폭 병풍으로 전해지고 전시되었으나 현재는 보관의 용이함을 위해 작품부분만을 분리하여 보관하고 있다. 이 작품이 씌어진 때가 1945년이라 알려져 있는데 이는 정확치 않다. 작품의 내용과 다른 여러 정황들로 살펴볼때 작품이 제작된 시기는 1943년으로 보는게 옳다.  


여러해 전 부친을 모시고 가족들과 논산 광다리로 찾아가 당시 모운 이강호가 머물던 집터와 ‘판각’의 존재를 확인했다. 300평 대지에 도편수가 지었던 한옥과 20~30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지붕이 바뀌었을뿐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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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고에서 「서봉모운이강호십곡병書奉 茅雲 李康灝十曲屛」의 의미와 내용을 자세히 살피고 작품의 내용을 기반으로 당시 어떤일들이 있었는지 또 학자⋅문인*들이 어떻게 교유하였고 당시 그리고 현대 가지는 그 의미는 무엇인지 상세히 살펴보려한다. 이와 함께 현산문집 중 「죽헌거사위공묘갈명」과 이현규의 삼촌 동원 이우영의 「원문노견」대련 족자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조부 이강호를 문인이나 학자로 볼 수 있는지 확실치 않다. 당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글을 많이 쓰시지 않았다고 알고 있고, 그나마 쓰셨던 글도 돌아가시기 전 거의 모두 소각했다 알고 있다. 서화감식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한다.

 

 

 



 

  1. 본론


  1. 결론